저는 2021년 비트코인이 급등하던 시기에 약 300만 원 정도를 투자했지만, 하루 15% 가까운 급락을 경험한 뒤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약 -25% 손실에서 매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저는 비트코인을 오랫동안 '투기판'이라고 불러왔습니다. 하루에 10~20%씩 오르내리는 걸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 생각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JP모건의 분석과 미국 퇴직연금 시장 개방 소식을 접하면서 처음으로 제 시각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제도가 실체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목차
- 금보다 안정적인 비트코인?
- 401k 개방과 XRP 재분류
- 제도가 만드는 실체
금보다 안정적이라는 비트코인
이달 들어 금 가격은 약 12% 하락했고, 은은 무려 22% 넘게 빠졌습니다. 반면 비트코인은 달러 기준 1%대 상승, 원화 기준으로는 약 6% 상승했습니다. JP모건의 니콜라오스 파니기르초글루 전략가는 금 시장의 유동성이 악화되면서 금 시장 참여도가 비트코인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서 유동성이란 자산을 빠르게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의 능력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이 충분히 있어야 가격이 안정적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JP모건에 따르면 금 ETF에서는 3월 1~3주 사이에만 110억 달러가 빠져나간 반면, 비트코인 펀드는 같은 기간 순유입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금 ETF를 꾸준히 보유해온 사람으로서 이 수치가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수천 년간 실물 자산으로 가치를 증명해온 금이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리다니요. JP모건은 이 원인으로 금리 인상, 달러 강세, 기관 투자자들의 차익 실현을 꼽았습니다. CTA(상품거래자문가)처럼 추세를 따라 매매하는 투자자들이 금·은 비중을 공격적으로 줄이면서 '과매수' 상태에서 '중립 이하'로 포지션을 바꿨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CTA란 선물 및 파생상품 시장에서 알고리즘 기반으로 추세를 추종하며 매매하는 전문 운용사를 뜻합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금의 장기적 가치를 훼손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란 전쟁 리스크 같은 지정학적 불안이 고조될 때 금이 하락했다가 반등하는 패턴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기적으로 비트코인이 금보다 '덜 흔들렸다'는 사실만큼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401k 개방과 XRP 재분류
가상자산 회의론자인 저조차도 이번 소식에는 눈이 멈췄습니다. 미국 백악관 정보규제사무소가 12조 달러(약 1경 8,000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401k) 시장을 가상자산에 개방하는 가이드라인을 최종 통과시킨 겁니다.
핵심은 면책 조항입니다. 과거에는 노동부가 가상자산 편입에 '극도의 주의'를 요구해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사실상 막아왔습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운용사가 적절한 절차를 거쳐 가상자산을 포트폴리오에 포함하면 손실 책임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것이 시장에 주는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401k 자금의 1%만 유입돼도 약 1,200억 달러(약 180조 원)의 신규 수요 발생
- 장기 보유 성격의 연금 자금이 유입될수록 가격 하락 시 완충 역할
- '클래리티 법안' 논의 가속화로 가상자산 연금 상품 출시 앞당겨질 전망
한편 일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 금융청(FSA)은 이달 XRP를 투기성 암호화폐에서 금융상품거래법상 '규제 금융상품'으로 재분류했습니다(출처: 일본 금융청 FSA). 여기서 금융상품거래법이란 증권사나 투자운용사가 취급할 수 있는 공식 금융상품의 범위를 정하는 일본의 핵심 자본시장법으로, 이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건 연금기금·보험사·국부펀드가 합법적으로 XRP를 포트폴리오에 담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SBI그룹은 6월까지 XRP를 일본 은행 인프라에 통합해 송금·결제에 XRP와 RLUSD를 활용하는 체계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제도가 만드는 실체
비트코인이 '코드 덩어리'라는 생각은 아직 완전히 지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도권이 그 코드 덩어리를 연금 포트폴리오에 담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투기판의 이야기가 아니게 됩니다. 금이 수천 년간 가치를 증명했다면, 비트코인은 지금 막 제도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의 초입에 들어선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려도 분명합니다. 사모펀드 감시단체 PESP는 광범위한 면책 조항이 투자자에게 위험과 높은 수수료를 전가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401k가 안정적인 은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라는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저 역시 이 지적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트코인을 소액으로 매수했다가 변동성을 버티지 못하고 손절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이 시장이 '지금이 바닥'이라는 확신보다는 '제도적 기반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ETF 투자를 통해 자산 배분의 중요성을 배운 입장에서, 비트코인을 포트폴리오의 극히 일부로 접근하는 방식은 이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단, 지금의 제도적 변화가 단기 반등의 근거가 아니라 장기 구조 변화의 신호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가상자산 투자는 원금 손실 위험이 있으며, 모든 투자 결정은 본인의 판단과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